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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 그치면

기사승인 2017.03.27  11:3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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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하린 원장(서울 서초·아름다운피부과의원)

▲ 이하린 원장(서울 서초·아름다운피부과의원)

해마다 이 맘 때 봄비가 내리면 나도 모르게 읊어지는 시가 있다.

'이 비 그치면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빛이 짙어 오것다.'

고등학교에 갓 입학했던 어느 봄날, 마른 얼굴의 안색이 창백해 보였던 국어 선생님은 교과서에 실린 이수복 시인의 시를 잔잔하게 낭독해 주셨다.

그 시는 덕수궁 돌담길을 혼자 걸으며 등교하던 내 마음 속에서 봄이 다 지나가도록, 아침마다 울려 퍼지곤 했다. 봄비 내리는 날, 교정의 곧 서러워질 연초록 풀빛을 배경으로 시를 읽어 주시던 선생님의 모습은 지금까지 내 추억의 아름다운 풍경화로 남아 있다.

국어 선생님을 좋아해서 문예부에도 열성적이었던 나는 선생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의 권유대로 의과대학에 가기 위해 결국 이과를 지원했다. 의대에 들어온 나는 문과적인 본성을 철저히 외면하고 새로운 자아를 개발하기 위해서 스스로를 철저히 세뇌했다. 오랜 수련 끝에 전문의가 되고 또 박사 학위까지 받던 날, 나는 비로소 모든 공부로부터 졸업을 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개원과 동시에 처음부터 다시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되는 낯선 과목들이 나를 압박해왔다. 관심도 재능도 없는 어려운 과목, 돈을 계산하고 인력을 관리해야 하는 '경영'은 내가 어렵게 이수해야 할 난제였다. 그것은 어느 누구도 어떤 선생님도 가르쳐 준 적이 없는 어려운 숙제였고 스스로의 상처를 통해 아프게 깨달아야만 하는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나는 원래 의사가 되는 일에 자신감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인간의 죽음과 자주 대면한다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육신의 질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의 버팀목이 될 강인한 정신력과 체력을 갖고 있을지 의문이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을 위로하고 돌보는 것이 나를 위로하는 또 하나의 방법이라는 것을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깨닫게 됐다. 또한 피를 많이 보지 않고도 환자를 대할 수 있는 피부과를 할 수 있게 된 것은 겁이 많은 나에게는 정말 감사한 일이었다. 그래도 현실은 그렇게 녹록하지가 않았다.

대학에 있는 동안은 논문을 쓰고 수련의를 교육하는 일이 쉽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개원을 하고 보니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레이저 장비회사와 기계비용에 대해 협상을 하고 건물주와 임대 계약서를 쓰고 직원을 구하기 위해 광고를 하고 세무 신고와 보험 청구를 하는 일들. 의사로서의 지식이나 능력과는 아무 관련도 없는 그런 일들은 환자를 보는 것보다 몇 배의 시간을 빼앗을 뿐만 아니라 나를 끊임 없이 지치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의사문인회 주최 독후감공모전에서 큰 상을 받게 된, 내 인생의 큰 전환점이 생기게 됐다. 우리의 삶에 우연이란 것이 없다면 그것은 필연일 수밖에 없다. 전화로 수상 소식을 들으면서 나는 갑자기 목이 메었고 시상식장에서는 눈물을 감출 수가 없었다. 문득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이 떠올랐다.

-이른 아침 숲길에는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그 중에서 사람이 적게 다니는 길을 선택했노라고, 그리하여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하는….

문학의 길은 내가 가보지 않은 길이지만 그 길 또한 험하고 외로운 길일 것이다. 그 길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다시 길을 찾을 수 있을까 아득한 생각이 든다. 상을 받던 날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의 얼굴이 다시 떠올랐다. 시상식을 며칠 앞두고 여고동창 사은회에서 뵌 국어선생님의 얼굴은 이마가 조금 벗겨지셨지만 그 미소는 그대로이셨다.

"그래 하린이가 글을 잘 썼었지. 큰 상 받은 것 진심으로 축하한다."
순간 나는 문학을 흠모하듯이 선생님을 흠모했던 여고생으로 다시 돌아 간 기분이었다.

우리는 각자의 앞에 놓여진 삶을 운명처럼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진실로 하고 싶던 일을 하면서 그 일이 천직이라고 느끼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게 되더라도 어쩌면 좋아하는 그만큼의 책임과 의무의 무게에 짓눌려 괴로워질지도 모른다.

나는 어린 시절 순수한 열정과 막연한 동경으로 글을 쓰고 싶어 했다. 문학의 길이 얼마나 어려운 길인지도 몰랐고 재능에 대한 확신도 없었으므로 순탄하게 그 길로 갔다고 해도 지금쯤 후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의사의 길을 가도록 내 등을 떠밀었던 부모님의 손길에 고마워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어느새 나는 의사로서 더 많은 사람들과 깊은 마음의 교류를 하면서 그들을 위로하고 도우며 이 길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을 갖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문득 내가 힘들고 외로울 때면 은밀히 숨겨둔 나만의 동굴로 들어가서 시집을 읽거나 그림을 보면서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지 않은가. 문학은 그럴 때마다 낮은 목소리로 나를 토닥여 주었다.

이 봄에도 인생의 길목에서 불확실한 미래를 두고 고뇌하는 젊은이들이 있을 것이다. 설령 현실의 무게로 인해 자신이 바라던 것과 다른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을지라도 마음 속 옹달샘 같은 소중한 꿈마저 버리지는 말기를. 그리하여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더라도 봄비 속에 짙어오는 그 '서러운 풀빛'을 그냥 시들게 방치하지 말기를 기도한다.

3월 이맘때쯤 내리는 봄비가 그리워지는 아침이다. 

Doctorsnews admin@doctorsnews.co.kr

<저작권자 © 의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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